하이니와 대화를 하기로 하고 처음 떠올랐던 것은 그 상큼한 이름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배반하는 묵직한 목소리였다. 음악방송을 몇 개 찾아보았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슬픔에 푹 젖은 눈빛. 그 와중에 찾아낸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수줍은 틈새로 발랄함을 겨우 드러내는 소녀. 그런데 또 이번 앨범의 뮤직비디오를 보니, 도도하고 시크한 자태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듯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미디어에 비치는 이미지는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에 불과하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하여간 ‘선입견’은 이런 것들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지나간 사랑에 아파하면서도 현재의 연애에서는 자신의 껍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와 나는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바보 같은 걱정이 들었다.

첫 만남은 이런 고민과 미리 생각해놓은 시나리오를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앞서 떠올려놓았던 이미지보다 선이 곱고 섬세한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낮은 편이기는 하지만 묵직하거나 그렇다고 수줍지도 않은 목소리에서는 가벼운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운동을 하고 와서 조금 힘들다는 그녀에게 이미 나와 있던 음식을 권했다. 관찰도 할 겸 숨도 돌릴 겸 식사부터 하고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제가 성격이 좀 급해서… 먹으면서 얘기하죠 뭐.”
단도직입적으로, 노래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했다.

“보통은 누구의 노래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전 그냥 노래가 좋았어요. 잘할 수 있는 것도 노래였고… 학교에서 하는 학예회 같은 데서 어떤 오빠와 듀엣을 했는데, 선생님이 너만 하는 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애써 뭘 생각하고 결심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웠다는 얘기다. 하긴 그녀는, 물론 노력과 훈련이 더해진 것이겠지만, 노래를 하지 않았다면 아까울 만한 음색을 가졌다. 그럼에도 비교적 어린 나이의 여성 솔로 보컬리스트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걸 그룹으로 시작하거나 혹여 솔로로 활동하더라도 걸 그룹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활동하지 않던가.

“저도 처음에는 걸 그룹을 염두에 두고 연습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음색이 어울리지 않았나봐요. 결국 솔로로 활동하게 되었죠.”

이제까지 출시된 그녀의 노래들이 다 제법 묵직한 발라드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으리라. 그런데 이번에 나온 앨범에 수록된 곡은 모두 미디움 템포 이상의 비트가 있다. 상당한 변신인 셈인데.

“이번 앨범이 훨씬 더 편해요. 실은 제가 힙합을 참 좋아하거든요. 특히 양동근 선배님을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발라드를 부를 때는 어떤 가수를 좋아하냐고 하면, 발라드로 유명한 선배들 이름을 꺼냈어요. 물론 존경하는 분들이지만…… 그런데 이번 앨범에선 양동근 선배님하고 같이 작업했잖아요. 정말 운이 좋아요.”

생각해보면 운이 좋기는 한 것 같다. 데뷔 3년차,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아직 스타덤에 올랐다고 하기는 이른데 싱글이 아닌 앨범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토록 좋아하는 선배 양동근과 함께.

“저는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믿어요.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는데, 혹시 운이 다할까 걱정도 되죠.”

‘운칠기삼’이라니, 20대 초반의 입에서 나오기에 조금은 묘한 말이 아닌가. 게다가 대개는, 운에 매달려 기다리고만 있거나 자신의 실패가 오로지 불운 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던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만 했다면 흔한 겸양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운이 다할 것을 걱정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기에 자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행운에 눈이 먼 사람 같지도 않다. 3의 기를 충실하게 닦으며 운을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아는 사람, 행운은 그런 사람의 손아귀에 잡히는 법이다.

타이틀곡 얘기를 해보기로 했다. ‘Clutch Bag’. 이 ‘패션 아이템’에 대한 다른 글들을 읽어보니 대개 여성 필자들은 실용과는 거리가 멀지만 미워할 수 없는 허영의 상징으로, 남성 필자들은 속에 뭐가 담겨있는지 궁금한 마법 자루 정도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물론 첫눈에는 끌렸지만 남자로서는 더는 관심이 없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어서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그 내면을 들여다봐주길 바라는 여자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직은 어린 소녀의 연애감정의 밉지 않은 허영을 클러치 백은 상징하는 게 아닐까.

“클러치 백에는 최소한의 필요한 물건밖에 넣을 수 없어요. 연애로 치자면 벅차오르는 첫 느낌이 아닌, 기댈 수 있고 편안한, 정이라고 할 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클러치 백은 그렇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고 삐죽삐죽 어그러지고 삐져나오는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해보려는 여자의 거짓말인 거죠. 지쳐있으면서도 사랑해, 보고 싶어, 라고 말하는.”

인터뷰 자료에서 기억에 남는 연애담이 없다는 말을 읽은 터라, 내심 아직 연애를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고 넘겨짚었는데, 이건 완숙한 연애를 해본 사람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얘기였다.

“어디서부터 연애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의 풋사랑은 빼놓고도 서너 번은 연애를 해본 것 같아요. 별로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최소한 해야 할 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늦더라도 집에 들어가면 전화를 해준다던지. 그렇다고 잔소리 하는 스타일은 아니고요, 몇 번씩 참다가 얘기를 해요. 차분하게.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더라고요.”

연애에 관한 한 남자는 늘, 어리다.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그래서 후회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고, 그러니 후회할 일도 없고, 최선을 다해도 안 되었으니 좋은 기억도 없는 것, 이해가 간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보았으니 이 노래를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내공이 보통은 아니다.

“아줌마 같다고 해요. 후배들 사이에서 제 별명이 동네 친한 언니거든요.”

동석했던 executive producer에게 이 후배는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저 후배는 걱정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자기 앞길 걱정하기에도 바쁠 것 같은데, 이건 오지랖일까. 아니 대개, 오지랖은 지나치게 진지하다. 이건 그냥 마음이다.

“제가 어른들하고 잘 맞아요. 그렇다고 성격상 아부는 못하지만요.”

Executive producer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했지만, 욕망이 앞서는 능수능란함은 아닌 것 같다. 이것도 그냥 마음, 최소한 성격이다. 아니나 다를까, 뜬금없이 필자의 아주 오래전 연애담을 꺼내놓았는데, 그녀는 돌직구라고 할 만한 거침없는 조언을 한다. 그렇다고 어린 친구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편에서 친구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뚜벅이라서요.”

본의 아니게 즐거운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터라 미안했다. 밝게 웃으며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친구 먹고 싶은데…

글/ 안재권(번역가, 칼럼니스트)